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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09 12:13

    사랑밭 새벽편지에 올라온 아빠의 시간을 살 수 있을까요?’란 글을 옮겨봅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 오늘도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아빠의 퇴근길은 무겁고 힘들기만 합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랑스러운 아들이 환한 얼굴로 아빠를 향해 달려와 안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지친 아빠는 아들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머쓱해진 아들이 지친 아빠에게 질문합니다.

아빠는 한 시간에 얼마를 버세요?”

아빠는 모든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지만, 마지못해 대답해 줍니다.

한 시간에 20달러를 번단다.”

아빠의 대답에 실망한 아이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 아빠에게 부탁합니다.

아빠, 저에게 10달러만 빌려 주세요.”

아빠는 돈이 필요한 이유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고, 가뜩이나 피곤한 자신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아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맙니다. 아이는 그렇게 힘없이 방으로 돌아가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아들에게 심하게 화를 낸 것이 맘에 걸리는 아빠,

아들의 방문을 살며시 열어 봅니다.

미안함에 아들을 다독여 주던 아빠는 아들이 필요하다던 10달러를 줍니다.

아들은 무척 기뻐하며,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꺼내더니 돈을 세어 봅니다.

“1달러, 2달러, 3달러..”

그 모습을 본 아빠는 돈이 있으면서 왜 돈을 빌려 달라고 했냐?”면서 아들에게 또 화를 냅니다.

아들은 돈이 부족했다며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아빠, 이제 20달러가 있어요. 아빠의 시간을 한 시간만 살 수 있을까요?”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고의 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투자할 때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자녀가 태어난 날부터 매일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 어느 날 난 절대로 결혼 안할 거에요라고 이야기합니다.


갑작스런 아이의 말에 놀란 아버지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결혼하면 아빠가 밤마다 기도해주지 못하잖아요, 난 아빠가 매일 기도해주는 것이 최고로 행복해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아이가 혼자 기도하는 것을 아버지가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커서 아빠같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 자녀의 기도를 들은 아버지는 그날부터 새로운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들이 닮을 만한 가치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지금부터라도 자녀에게 기도의 시간을 선물해 보십시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1.28 16:52

    교회는 절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절기를 기억하기 위해 교회력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교회절기하면 우리는 ‘성탄절’ 혹은 ‘부활절’, ‘추수감사절’ 정도만 알고 있는데, 교회력은 ‘대림절’에서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4주전에 시작합니다. 대림절 4주가 지난 이후 아기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지난 이후에 ‘주현절’이 있습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월 6일부터 사순절까지의 절기입니다.


그리고 ‘사순절’이 있습니다. 사순절에 고난주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있고, ‘오순절’(성령강림절)이 있습니다.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이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 가장 긴데, 거의 6개월 정도 지속됩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추수감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절기는 대림절에서 시작하여 추수감사주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번 주는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待臨節)은 ‘기다릴 대’(待), ‘임할 림’(臨) 자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영어로는 대림절을 ‘Advent’라고 하는데 ‘오다’라는 뜻의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마라나타’라는 아람어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마라나타를 어떻게 띄어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선 ‘마란 아타’(Maran atha)라고 읽으면, ‘우리의 주님께서 오셨습니다’(Our Lord, has come)란 뜻이 됩니다.


반면, ‘마란아 타’(Marana tha)라고 읽으면 ‘오, 주님, 오시옵소서’(O Lord, Come)란 뜻이 됩니다. 따라서 ‘마란 아타’는 ‘오신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고,


‘마란아 타’는 ‘오실 주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는 ‘마란 아타’와 ‘마란아 타’ 사이에 사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대림절을 보내는 성도의 자세는 오셨던 주님을 고백하면서 그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대림절은 새해에 대한 기다림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림절을 통해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1.22 17:20

    얼마 전에 읽은 글 중에 깊이 묵상해볼 글이 있어서 그대로 옮겨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경건의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9일 동안 무사히 금식을 마친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엄격한 경건과 돈독한 신앙이 오히려 형제를 짓밟고 자신들의 영성마저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욕하고 질타하면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을 어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 긍휼하게 여기고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경건은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과 믿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거부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끔찍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1.21 16:57

    전남 영광의 한 자락에서 생명공동체를 일구고 살아가는 생명 운동가 황대권씨가 어느 대학 강연에서 밝히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서울대 농과 대학 시절 그는 격변기의 한국 정치 속에서 피끓는 젊은이의 한 사람으로서 마냥 도서관에서 공부만 할 수는 없었기에 사회변혁을 외치고 불의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력 때문에 후일 30세의 미국유학생이 이유도 모른 채 간첩단 사건의 주동자가 되어 투옥된 것입니다.


그는 억울하였지만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떠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매일 매일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삭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을 다독이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마음도 안정되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교도소의 콘크리트 틈 사이로 잡초 하나가 자라난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그는 그 잡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구나 너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같구나”


그냥 하찮게 여길 수도 있는 잡초 속에서 그는 생명이란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잡초 하나를 통해서 생명의 경외심을 느끼고 그것을 살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생명의 소중한 위대함을 경험하고 나니 이전에 그가 목숨처럼 여겼던 신념이란 것이 너무나 작게 여겨지더랍니다.


그것이 사회주의건 민주주의건 좌파건 우파건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이데올로기가 생명 하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큰 깨달음 앞에서는


다 쓰레기처럼 여겨졌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로 그는 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오늘날 좌우이념이 더욱 극렬하게 대비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념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진정한 생명운동가이시기 그리스도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1.07 18:44

     가을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오곡백과(五穀百果)의 결실을 보면서, 결실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해의 결실은 우리가 흘린 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결실을 맺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맺어진 결실, 즉 삶의 결과물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마음은 당연한 인간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감사는「그리 아니하실지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를 지향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는 풀무불 앞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고백했던 신앙의 고백입니다.(단3:18) 이것은 결과와 상관없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항상 우리는 결과에 맞물린 감사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무엇 때문에’의 감사입니다.


그러나 깊은 감사는 결과와 상관없는「그리 아니하실지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을 때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소원대로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감사할 때 그것이 진정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감사를 더 기쁘게 받으십니다. 더불어 감사가 미래를 여는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현재에 어떠한 결실도 없는 빈광주리와 같은 삶이라 하더라도, 감사를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장차 빈광주리를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는 미래를 위한 저축성 기도와 같으며, 미래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장하는 하늘 담보물(擔保物)인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의 삶에 바라던 것을 얻지 못했더라도, 감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하나님께서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감사는 범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것은 일상의 평범함에 대한 감사입니다.


매순간 평범한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누리는 복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망각한채로 삽니다.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처럼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보고 듣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산책하는 것, 가족이 함께 자유롭게 외식하는 것, 건강하게 자고 일어날 수 있는 것,


모든 일상이 감사의 내용인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옵니다. 한 주 동안 여러분의 감사의 내용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0.31 16:23

    다음 내용은 前 경북대 총장 박찬석님 회고 중에서 홍사범씨가 옮긴 글입니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으로,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우리 집 역시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아버지는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 보내셨다.


 그러나 대구 중학을 다니면서 공부하기 싫었던 나는 1학년 8반 68명 중 68등이라는 성적으로 결국 꼴찌를 했다.


어린 마음에도 부끄러운 성적표 가지고 고향에 가서 부모님께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에서 68등을 1등으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으셨기 때문에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시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 간 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했더냐?”라고 물어보셨다.


 “앞으로 더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베.” “자네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고 계셨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울컥하는 마음으로 “아부지...”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내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죄드리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 말을 시작하려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고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목회의 경험이 더해질수록,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서로를 향해 부족한 면이 있어도,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 영적 가족공동체인 교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를 향해 하나님 아버지가 참고 기다리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0.28 15:36

     한국은 사계절을 통해 세월의 흐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담아두신 지혜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곳곳에 곱게 물든 단풍을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단풍이 드는 이유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최저기온이 5도씨 이하로 떨어지는 가을에 접어들면 광합성을 멈추고 나뭇잎에서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녹색이 사라지고 남아있는 붉은 색과 노랜색 색소가 드러나는 것이 단풍입니다.


사실 나무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바로 단풍입니다. 그런데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나뭇잎 죽이기로 볼 수 있지만, 나뭇잎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를 살리기 위한 자신의 희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단풍이란 자신을 희생하기 시작할 때 감추어졌던 아름다운 색깔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편 나무는 가을이 되어 강수량이 적어지면, 광합성으로 증발되는 물의 양보다 뿌리에서 공급되는 물의 양이 적어지므로, 살기 위해 잎사귀를 떨어내고 긴 겨울을 나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에게 심어주신 창조적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살기 위해 버려야 하는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피조물세계의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은 이러한 법칙을 거스르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것을 버리는 피조물이 아니라, 더욱 가지려고 몸부림을 치는 존재입니다.


도종환의 ‘시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에 실린 ‘단풍드는 날’이란 시를 보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防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이라고 노래합니다.


살면서, 자신이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그 인생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부였던 것까지 아낌없이 버리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가장 절정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가을. 고운 단풍 앞에서 하나님이 단풍 속에 담아두신 십자가의 교훈을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0.17 13:50

    교회 앞마당에 열린 감나무의 색깔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만큼 나이가 들면서 시간의 유속도 더욱 빨라지는 듯 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제 시간의 속도는 40마일입니다. 40마일로 달리다보니 벌써 2014년 한 해도 달력 9장을 넘기고, 고작 달력 3장만 남겨두었습니다.


얼마 전 읽은 김진홍 목사님의 칼럼을 보니까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실제로 사람마다 시간의 소중함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같은 40년의 세월을 살아도, 얼마나 의미있게 열심히 살았느냐에 따라서 세월의 길이가 각각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창세기 4장과 5장에 나타난 가인과 셋의 후손의 계보가 떠 올랐습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각각 가인과 셋의 후손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계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창세기 4장의 가인의 계보는 살아간 사람들의 인생의 연수가 계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고,


창세기 5장의 셋의 후손들은 그들의 산 인생의 연수가 정확하게 계수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가인의 후손들을 세상의 문명, 문화를 발전시키고, 주도해온 사람들입니다. 반면 셋의 후손들은 단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가인의 후손들의 계보를 더 주목하겠지만, 성경은 셋의 후손들의 계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후손들의 인생을 계수하지 않고, 셋의 후손들의 인생만 정확히 계수합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의미있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100년을 살아도, 하나님없이 산 인생의 시간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산 시간은 값진 시간인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을 살았느냐보다 어떤 삶의 시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 인생은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성취했기에 의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있기에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14.10.17 13:45

     부흥회의 진한 여운이 남습니다. 3일 동안 주신 말씀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날(월)부흥회, 우리 안에 있는 옛성품과 옛습관의 아말렉을 진멸하고,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날(화)부흥회, 우리의 아픔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진정한 소통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수)날 부흥회, 우리 인생의 주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우리를 보내신 삶에 자리에서 사명자로 헌신해야 한다.


강사 목사님을 통해 주신 삼일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우리 삼광공동체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교훈삼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궤계와 교회 안에 병들고, 낡은 구습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도록 성도들을 힘써 가르쳐 제자화 하는 일에 더욱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시대에 우리 삼광교회가 지역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교회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는 다음 세대들을 말씀맡은 자들로 세우는 일과 연약한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더욱 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복음 중심의 교회로 세워져 가고, 인본주의적인 싹은 모두 철저히 제거하고, 영혼구원과 온 성도들이


이원론적인 신앙이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 진정한 사명자로써, 예배자로써 살아가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등불이 되는 교회로써, 가르치고, 치유하고, 증거하는 사역에 헌신하고, 주님의 제자도를 실천하고,


다음 세대를 세워가는 말씀과 복음 중심의 교회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부흥회 자리를 지켜주시고, 각자의 섬김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일해주신 모든 성도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목사 

14.10.17 13:42

    기독교의 신앙은 바른 구원의 확신 위에 서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핵심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와 사상의 공통점은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을 결부시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에서 보는 우리 자신이 바로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불교는 욕심을 버려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교육과 자기성찰, 자기 계발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가르칩니다.


흰두교는 자아에서 벗어나 신과 연합하려고 노력해야 구원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선행이 구원의 열쇠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회개와 기도, 율법 준수가 구원을 낳는다고 합니다. 뉴 에이지 사상은 새로운 시각을 통해 만물과 연결되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도교에서는 도에 자신을 정렬시켜 평안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결단코 우리의 선행이나, 공적, 우리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행위와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당신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무능한지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친히 우리의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구원의 방편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기만 하면(믿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구원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글쓴이 담임목사 하의용 목사

 

삼광교회 연혁

 

교회 태동(1970년~1980년)

 
1971. 1. 3
설립 예배 (서대문구 홍제2동 산33번지에서 이경재전도사 가정에서 정희임 이덕순 이은순 김덕양 고태윤 양수연씨, 등 7명이 예배드리다)
 
1974. 6. 3
교회 건축을 시작하다.
 
1974. 7. 18
교회 건축을 완공하다.
 
1975. 3.
이경재 전도사 목사임직.
 
1975. 4.
실행위원회 조직하다
(위원:조덕규 한창규 김장용)
 
1977. 11.
용인기도원 부지 매입하다.
 
1978. 7. 17
용인기도원 건축 준공예배 드리다(25인승 소형버스 구입).
 
1982. 3. 14
실행위원회를 조직하다.
(위원:장인봉 한창규 김근호 나윤섭 김명남 안명훈 이은애 김정애)
 

전환기(1985년)

 
1982. 4.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교단소속으로 가입하다.
(복구 용천노회 제1회기 회원교회가 되다).
 
1984.
용인기도원 매각하다.
 
1985. 6. 30
교회 이전 후 첫 예배를 드리다.
(홍제2동 321-28에서 홍제1동 158-23).
 
1986. 6. 8.
공동의회에서 장로, 안수집사, 권사 피택하다.
 
1986. 10. 5.
위임 및 임직예배(이경재목사 제1대 담임목사로 위임하다).
제1대 장로 장립(한창규 김근호 나윤섭 이명수 장로)
제1대 안수 집사 장립(김명남 김동명 이은재 집사)
제2대 권사 취임(엄부자 강용순 김순환 김정애 엄인덕 변정섭 권사).
 
1989. 3. 6.
삼광선교원 개원.
 
1990. 4. 17.
용천노회 정기회(이경재목사 노회장 선출).
 
1990. 9. 16.
공동의회-안수집사 피택(이갑운 김장용 강정근 표충복)
 
1991. 1. 13.
제2대 안수집사 장립(이갑운 김장용 강정근 표충복)
 
1994. 12. 3.
제2대 장로 장립(김명남 이갑운)
제3대 안수집사 장립(김영호 김정남 박종덕 안명훈 이근영 장삼수 전영선 한성웅)
제3대 권사취임(김말미 김명식 김성예 김옥순 선우순정 선우순필 선우정혜 윤일병 심개춘 이숙경 이옥자 정옥희 조영자 진말례 최신애 하정순 한영희 홍경애 홍기춘 황분선)
 
1995. 4. 29.
제3대 장로 장립(김장용)
 
1995. 8. 23.
창립25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구성
 
1996. 3. 3.
창립25주년 기념예배. 25년사 발간 *사택 매입 후 담임목사 명의로 이전 등기필.
 
1996. 6. 6.
창립25주년 전교인 체육대회
 
1996. 7. 29 ~ 8. 1.
창립25주년 전교인 수련회(주일학교~장년부)
 
1996. 10. 3.
창립25주년 전교인 체육대회
 
1996. 11. 11.~14.
창립25주년 부흥회(강사 : 우희영 목사)
 
1996. 12. 22.
창립25주년 기념음악회
 
2000. 10. 16.
교회증축 기공예배, 증축시작.
 
2001. 9. 30.
교회중축 완공하다.
 
2001. 11. 4.
증축 입당예배를 드림.
 
2002. 1. 13.
은퇴식 장로 : 한창규 집사 : 안명훈 권사 : 황분선 엄인덕 강용순 진말례 정옥희.
 
2004. 6. 27.
제4대 장로장립(한성웅)
집사장립(송희영 김찬기 임춘선 임동원 김균수)
권사취임(김혜경 장영옥 김정옥 양산옥 김영화 최용선 안순근 임신자 이은순 김혜원 김준연 명예권사(박순묘 심복성 정춘란 윤정임)
 
2007. 12. 30.
김근호장로 은퇴
 
2009. 9. 6.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구성하다.
 
2010. 4. 18.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재구성하다.
 
2011. 1. 22.
헌당 및 임직예배
원로장로 추대 : 김근호 장로
제5대 장로 장립(김찬기 임춘선)
집사 장립(최명환 유민재 조기성)
권사 취임(이연숙 이영희 전봉선 조숙자)
명예 권사(강정순 김영자 김홍분 맹정희 송이순 정선화)
은퇴식 : 김명식 김성례 변정섭 선우순필 하정순 홍경애
 

도약기(2011년)

 
2011. 10. 2.
하의용 담임목사 부임
 
2011. 12. 31.
이경재목사 원로목사 추대 하의용 목사 제2대 담임목사로 위임하다.
 
2014. 1. 19.
은퇴식(장로 : 김명남 이갑운, 집사 : 박종덕, 권사 : 홍기춘)
 
2015. 1. 18.
은퇴식(장로 : 한성웅, 권사 : 심개춘 이옥자 한영희)
 
2016. 1. 17.
은퇴식(집사 : 김동명, 권사 : 김정옥 김혜경 조영자)
 
2017. 1. 15.
제6대 집사 장립(정운관 이상남 김두환)
제6대 권사 취임(최지숙)
명예권사 추대(곽양근 주정이 나복임 김화선 최정지)
 
2018. 1. 21.
은퇴식(집사 : 송희영, 권사 : 김영화 최용선 임신자)
 
2019. 1. 19.
집사장립, 권사취임, 은퇴식
제7대 집사 장립(송희준 송태원 동영탁 최재현 장근수 양동춘)
권사 취임(임순자 조미정 나영임 한효숙 구영숙 조인숙 김옥진 윤영희 박나영 김춘화 김효정 전미영 임혜숙 서숙희 김경미)
명예 권사(강정순 김영자 김홍분 맹정희 송이순 정선화)
은퇴식 : 안순근
 
2019. 12. 29.
은퇴, 이명수 장로
 
2021. 1. 16.
창립 50주년 기념
제 6대 장로 장립(송태원, 김두환)
제 8대 집사 장립(김재목, 유현상)
제 8대 권사 취임(조성은)
 
2022. 1. 16.
창립 51주년 원로장로 추대 및 은퇴예배
원로장로 추대 : 나윤섭 장로
안수집사 은퇴 : 최명환 집사
권사 은퇴 : 김준연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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